그럴듯한 사무실도 없습니다.
임직원은 소장 한 명 뿐입니다.
그러나
연구는 합니다.
분야가 철학이라서 특별한 기자재도 필요 없습니다.
책과 컴퓨터와 프린터와 재털이, 그리고 커피 보온병만 있으면 족합니다.
사실 그동안 틈나는 대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연구 결과를 논문이나 책으로 완성해서 펴낼 시간과 그 시간을 살 수 있는 돈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학술지 논문으로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으렵니다.
교수가 되려 하거나 계속 시간강사로 연명하려는 마음을 접는다면 논문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써도 읽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책은 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읽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 주변을 맴도는 일을 접으니 아쉬운 것이 있기는 합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도서관의 책들과 학술논문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인 학생들과의 수업이 그립습니다.
벤치에 앉아 수업에서 미처 해소되지 못 했던 학생들의 질문을 듣는 일도 그립기는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연구소를 차린다고 생각하니 다시 강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강의가 있다고 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주제에 대해서도 강의를 개설할 수도 있습니다.
왜 진작 연구소 차릴 생각을 못 했나 후회되기도 합니다.
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이제 해보려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회가 심각한 문제들로 곪아터지고 있음에도 정작 그 문제의 담당자인 철학이 아무런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은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조금이나마 바꾸어보고자 합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윤리 규범을 비교적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이 윤리 규범인지를 묻는다면 그들은 그 규범을 잘 따랐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삼강오륜"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듣게 될까요?
아마도 예전 사람들처럼 "삼강오륜!"이라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윤리규범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것인가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있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요? 참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혼란스럽기만 하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윤리 규범으로 여겨도 될 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지가 불분명한 규범 하나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입니다.
이것은 오륜 가운데 하나인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 사이에 차례가있다는 뜻의 장유유서(長幼有序) 규범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꼭 같다고보기는 어려운 규범입니다.
다른 이유를 들 필요 없이 나이가 더 어린 과장이 윗사람이고 나이가 더 많은
대리가 아랫사람으로 구분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것들이 똑같은 규범이 아니라는 점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선배는 윗사람, 후배는 아랫사람.
부모는 윗사람, 자식은 아랫사람.
선생은 윗사람, 학생은 아랫사람.
나이 많은 사람은 윗사람, 나이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
주인은 윗사람, 피고용인은 아랫사람.
교수는 윗사람, 시간강사는 아랫사람.
원청회사 직원은 윗사람, 하청회사 사장은 아랫사람.
돈 많은 사람은 윗사람, 돈 없는 사람은 아랫사람.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마도 우리 사회 전체의 질서는 바로 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황당한 일은 이런 일이 '민주공화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 그에 따른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과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은 학생인권선언문이 낭독된 이후의 학교 교실을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칠게 표현해서 학생인권선언은 학생이 더 이상 아랫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에 의해 유지되던 학교 안의 질서가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요?
윤리 규범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푸른 눈을 가진 공자와 맹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요?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에서는 어떤 식으로 윤리 규범을 세울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구해보려 합니다.
오래전부터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라는 것에 대한 보다 정밀한 개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것 저것 뒤져보았지만 저의 의문을 풀어줄만큼 만족스러운 대답을 아직 발견하지 못 했습니다.
대부분 정치학적인 맥락에서 설명된 것들이라 철학적인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못 했나 봅니다.
그 개념을 정립하고픈 이유는 그것이 윤리와 교육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추정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는 없지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시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공부가 좀 더 진행되면 이 주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입식 수업을 자제하고 토론식으로 수업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계속 있어왔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토론식 수업이 잘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자면 여러 다양한 요소들이 발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학벌폐습이라든지, 대학입학제도라든지, 대학제도라든지, 줄세우기 평가방식이라든지 등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들은 모두 다 교육의 외적 요건에 해당하는 것들로서 실제 교실에서 진행되는 교사의 교육행위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사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외적 조건을 무시하고 자신의 50분 수업을 토론식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사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자연스럽게 토론식 수업은 정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교사들이 토론식으로 수업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서 못 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혹입니다.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는 것은 대학에서의 경험입니다.
교양과목도 가르쳤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학과 학생들로부터 자신들의 학과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경이로운 일은 몇몇 교수들의 경우를 제외한 대학의 모든 강의실에서조차 토론식 수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교육은 토론식 수업을 방해하는 외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교수가 토론식으로 진행하고자 하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잘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서'라는 결론 밖에 도출되지 않습니다.
토론식으로 수업하라는 사회적 요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가련한 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해방 이후 우리나라 학자들이 주로 해왔던 일은 서양의 지식을 수입하여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제품 상태의 새로운 지식들이 넘쳐 났기 때문에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방식의 지식 수입 행위는 우리나라 학자들 스스로의 지식 생산 능력을 퇴화시켰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 서툰 사람은 토론식으로 수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토론식 수업의 본질적 특징은 피교육자의 지식 생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의 지식 생산은 주관적인 측면에서의 지식 생산입니다.
피교육자가 생산한 지식이 객관적으로는 새로 생산한 것이 아니지만 그 사람 자신으로서는 새로 생산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주관적인 지식 생산은 이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즉, 어떤 것이 왜 그러한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론식 수업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각하는 힘을 통해 수업에서 다루는 지식이 왜 그러한지를 이해하게끔 진행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라도 교사가 그것을 단순히 전달만 했을 때 학생들에게 그 지식은 단순한 기억일 뿐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생각하는 힘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이러이러하다'는 언명으로 끝나지 않고 '나는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이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식으로 학생들로부터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에게 생각함의 자유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교사와 학생이 수직적인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지 않고 진리 앞에서 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게 됩니다.
더 많은 것들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로만 판단해보아도 토론식 수업이 민주공화국의 시민을 양성하는 것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론식 수업과 관련된 학문적인 근거라든지, 실제 수업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법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하여 책으로 발표하려 합니다.
전화 및 문자: 010 9596 8467
메일: kimc12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