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우리말로 옮겨놓는다.
원문 제목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이다.
칸트의 글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글일 것이다.
233년 전에 발표된 글이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칸트의 메시지는 현재에도 여전히 인류에게 유효하다.
지구 곳곳에서 인간다움에 반하는 행위들이 국가라는 이름하에, 종교라는 이름하에 자행되고 있다.
수많은 국가들은 이름만 ‘민주국가’일뿐 실제는 여전히 ‘전제국가’에 머물고 있다.
인류문명의 수준은 아직도 ‘생각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 쪽보다는 ‘육체적 본능에 따르는’ 동물 쪽에 더 가까이 가 있다.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차지할 여성들 대부분은 여전히 근거 없는 낡은 불평등의 구속에서 벗어나질 못 하고 있다.
가정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시대가 되었건만 일자리를 잃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지구 전체로 점점 더 넓게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 불행과 고통의 원인 제공자로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를 의심하고 있을 뿐 그 자본주의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탓을 돌아보지 않는다.
학자라는 사람들에게 ‘계몽주의’는 이미 낡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인류는 사실상 아직 한 번도 계몽주의에 도달한 적이 없어 보인다.
칸트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긴급히 요구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저작권 침해를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려 놓는다 (<자료실>에서 PDF파일 다운로드할 수 있음).
안산의 세월호 기억식에 참석 못 해 미안하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어떠한 거짓말에도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 글을 고인들께 바친다.
2017년 4월 16일
김창원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이 있다.
류시화씨가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을 모아 펴낸 아름다운 책이다.
옆에 가까이 놓고 칸트 책을 읽다가 머릿속 산책을 하고 싶은 때 잠깐씩 읽어보면
어느새 풀과 나무와 냇물과 햇살이 비추는 자연과 그 자연에 어울리는 순결하고 고귀한 인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을 때마다 늘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인디언 추장들의 말을 들어보면 인디언 사회는 백인들의 사회보다 더 없이 훌륭하고, 더 없이 민주적이고, 더 없이 개방적이고, 더 없이 환경 친화적이고, 더 없이 자유롭고, 더 없이 명예롭고, 더 없이 지혜로운 사회였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인디언 사회는 생존하지 못 하고 멸망해 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민주적이고 개방적이고 환경 친화적이고 자유롭고 명예롭고 지혜로운 국가를 만들려고 애쓰는 일은 정말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차라리 더럽고 비열하고 약속 어기는 일을 밥 먹 듯 하고 돈만 밝히고 남들은 어쨌건 자기만 배부르면 된다고 여기는 백인들의 사회가 더 낫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인디언들은 무슨 잘못을 한 것인가?
아니,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만들었던 사회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그런 사회를 만들었던 인디언들이 정녕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번에 칸트의 글, 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uergerlicher Absicht을 번역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번역본은 <자료실>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